•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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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김금원(金錦園) <제1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7-11-15 09:36     최종수정 2017-11-15 09:54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봄은 화려하다. 사계절 중에서 새로운 생명들이 다투어 고개를 들고 나오는 계절이다. 여름은 산하가 온통 가슴 설레는 청록색이어서 좋고 가을은 가슴 뿌듯한 풍성한 수확이 기다리고 있어 즐겁고 겨울은 새봄을 맞을 준비로 바빠 숨 막히는 기다림의 아름다움이 있어 금원이 봄 다음으로 좋아하는 절기다.

삼호정(三湖亭·현 원효로서 마포로 넘어가는 삼개고개)의 봄은 더 없이 아름다웠다. 갖가지 봄꽃들이 만발하고 작은 연못엔 금붕어들이 원앙을 이루어 노닐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웃자란 대나무들은 올 들어 더욱 몰라보게 컸다.

1847년 금원(金錦園:1817~1851)이 31살이 되는 봄이다. 오늘은 운초(金芙蓉:1800~1857·호)·경춘(瓊春)·경산(瓊山)·죽서(竹西:1817~1851)가 오는 날이기도 하다. 삼호정 동인이 모이는 날이다. 삼호정은 규당(奎堂) 풍류문사 김덕희(金德熙)가 짓고 김금원이 마음껏 사랑을 나누는 공간(별장)인 동시에 삼호정 동인들이 시 짓고 노래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삼호정 동인(한국 최초 여류 동인)이 모이는 날이면 금원이 정원에 나와 운초를 기다렸다. 오늘도 금원은 운초를 기다리기 위해 정원 앞에서 서성댄다. 남편은 일찌감치 외출하였다. 운초는 항상 경산·경춘·죽서 보다 조금 일찍 온다. 맏언니로서 시뿐만이 아닌 언행에도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삼호정의 안주인인 금원은 운초(김부용 호)를 깍듯한 예의로 대우하였다. 자신보다 17년이나 연상으로서 시가 좋아 모여 언니동생 하지만 어머니뻘도 되는 연배다. “언니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어요. 오늘은 봄바람이 제법 쌀쌀해요! 꽃샘추위 같아요...”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거실에 그들은 마주 앉아 녹차를 마신다. “금원이 너 표정이 퍽 밝아 보인다. 어젯밤에 서방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모양 같구나! 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서방의 사랑이 제일이다. 시도 좋지만 서방의 사랑을 소홀히 하지 말거라!” “참 언니가 오늘따라 언니답지 않은 말씀을 하시네... 우리 주제에 사랑 타령 할 처지인 가요?” 금원이 운초를 빤히 쳐다보았다.

금원과 운초가 얘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경산·경춘·죽서가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언니들 멋져 보여요!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시기에 우리들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얘기꽃을 피우세요?” “그랬구나. 언니께서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셔서 그만 너희들이 들어오는 것도 몰랐네... 미안하다.” “재미있는 얘기가 무엇이기에?” 토끼눈처럼 반짝이며 호기심을 높였다. “여기 너희들을 기다리는 녹차가 있느니라! 어서들 와서 차부터 마시고 시회(詩會)를 벌이자꾸나...” 금원이 운초와 나누던 얘기를 서둘러 끝내고 삼호정에 모이는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하지만 죽서가 막무가내다. “금원언니가 얼굴이 왜 빨개졌어요? 운초 큰언니가 무슨 얘기를 했기에... 운초 큰언니가 얘기해주세요! 우리들 셋 모르게 할 얘기가 있어요?” 옆에 있던 경춘과 경산도 “그러게 말이예요! 우리가 들어오니깐 왜 얘기가 뚝 끊어졌어요?” 라고 죽서를 거들고 나섰다. “별 얘기 아니야! 오늘따라 금원이 얼굴이 정원의 꽃처럼 화려하고 예뻐 어젯밤에 규당에서 황홀한 사랑을 받았느냐고 물어보고 있던 중이었어... 여자란 서방한테 따뜻한 사랑을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겠어? 사실 우리들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사랑의 노리개야...”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언니는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고 영혼의 자유를 위해 이렇게 우리들만의 공간을 갖고 인생을 즐기고 있는데요.” 눈치 빠른 금원이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랬다. ‘봄은 가고 꽃 이미 졌는데/ 해당화만이 붉게 피었구나./ 이 꽃마저 지고나면/ 헛되고 헛된 봄날이여.’ 금원의 《무제》(無題)다.

삼호정에 모이는 다섯 여류시인은 모두 양반의 서녀 또는 기녀 출신의 소실들로 시재(詩才)엔 뛰어났으나 자식도 똑같이 없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무정하기까지 할 것이다. 시의 내용처럼 해당화마저 지고나면 헛되고 헛된 봄날이 될 것이란 구절이 그녀들의 심정일 게다. 꽃다운 그녀들의 얼굴에도 예외 없이 세월의 무게가 조금씩 나타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눈가와 이마에 주름살이다. 금원은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하나둘씩 나타난 것을 발견한 듯 하다. 눈 아래 기미가 언뜻언뜻 보이고 탱탱했던 엉덩이 살에 긴장감이 빠졌다. 잠자리에서 남편의 손이 유방에서 엉덩이를 스치듯 음문으로 갈 때 금원은 엉덩이에 긴장감이 빠졌음을 실감하였다.

병치레를 안고 사는 죽서에겐 잠자리 사랑얘기에 귀가 솔깃했으리라... “내가 오늘 조금 일찍 왔어! 그래서 사사로운 얘기를 금원아우와 하다 그만 아우들한테 들켰네! 사실 우리들에겐 어찌 보면 사랑이란 사치스런 욕심일지도 몰라! 벌 나비들이 꽃에 날아와 꿀만 빨아먹고 날아가듯이... 그리고 뻐꾸기가 비둘기 둥지에다 새끼를 키우듯이 말이야!” 운초의 음성에 갑자기 울음기가 섞였다. “언니, 갑자기 언니답지 않게 그래! 자 우리 기분 전환으로 노래나 한 곡조 부르자고...” 금원이 분위기 반전을 위해 벽에 세워두었던 거문고를 켜며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운초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미안하다. 내가 공연한 말을 꺼내 분위기를 흐려놨네. 나는 오늘따라 금원이 얼굴이 정원에 활짝 핀 연산홍같이 아름답고 생기가 있어 보여 어젯밤에 남편한테 뜨거운 사랑을 받았느냐고 농담을 했는데 그만 내가 실수를 했어. 미안해 아우님들! 나이 들면 그렇다니깐!” 운초가 경산·경춘·죽서를 끌어다 의자에 앉히며 분위기를 정돈하였다.

‘달 뜬 다락 가을 깊고 옥 병풍 허전하네./ 서리 친 갈밭에는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들만 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허난설헌의 《규원가》다. 다섯 여류시인들의 10개 동공엔 어느새 수정 같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금원의 무릎으로 떨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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