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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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황진이(黃眞伊) <제16話>

기사입력 2017-03-15 09:18     최종수정 2017-03-15 09:18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불덩이 같은 아침 해가 불끈 솟아오를 때 진이와 이생은 다정한 부부모양 두 손을 꼭 잡고 천왕봉(天王峯)에 올랐다. 곱게 물든 단풍에 천지사방이 불속처럼 뜨겁게 아름답다. 진이는 천왕봉에 오르자 태양을 향해 삼배하며 역시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어머니가 진이를 황진사에게 맡기고 송도를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풍문을 들었을 뿐 그 후 종적을 몰라 늘 염두에 두고 극락왕생을 기도하였다.

엄수(嚴守) 거문고 스승한테 지리산에서 거문고를 타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어언 십 수 년이 지났다. 예성강에 장님 시신이 떠올랐다는 소식에 비만 오면 거문고를 타는 귀신이 나타난다는 풍문 등으로 미루어 보아 어머니 현학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확신이 선지 오래다.

아침 해가 불끈 솟은 태양을 보고 어머니를 위해 극락왕생을 빌은 진이의 전신에 맥이 풀렸다. 상무주암에서 방사까지 즐기며 여유 있게 휴식을 취하고 올라왔으나 체력이 바닥이 났다. 밤은 깊었으나 만공산에 명월이 가득하다. 춥고 배도 고프다.

상무주암에서 가지고 온 주먹밥으로 허기를 메웠으나 몸이 떨리고 눈이 들어갔다. “내려갑시다. 더 있을 수가 없네...” 진이는 이생에게 업히다시피 하여 오후 늦게 상무주암에 도착하였다. 기진맥진 상태다.

진이는 몸이 아무리 무거워도 거문고는 갖고 다닌다. 정신이 혼미하고 육신이 녹초가 되었어도 거문고를 타면 영혼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내일 금강산을 향해 떠날 생각인데 지금 몸 상태론 불가능한 상태다. 이생이 진이를 부축하여 말에 몸을 맡긴다 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저녁을 먹고나니 몸은 더욱 파김치가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을 때는 진이는 거문고에 세상 시름을 떠 넘겼다. 주지스님에게 맡기었던 거문고를 찾아 타기 시작하였다. 중국 죽림칠현 완적(阮籍)의 《영회시》(詠懷詩)다. ‘깊은 밤 잠 못 이루어/ 일어나 앉아 거문고를 타려니/ 엷은 휘장으로 밝은 달빛 비치고/ 맑은 바람 옷깃에 스며드는데/ 외로운 큰 기러기 들판에서 애처롭게 울고/ 둥지를 찾아드는 새 북쪽에서 우짖는다./ 배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근심스런 심사에 홀로 마음만 상할 뿐이네‘ 그랬다. 이생이 옆에서 손발이 되어 보살피나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던 이사종과 6년간 계약결혼과는 상황이 좀 다르다.

조선팔도 유람 길에 여자 혼자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었다. 서로 필요한 관계인 남자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생은 어느새 표정만 봐도 지금 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완적의《영회시》가 진이의 거문고 음률을 타고 상무주암의 밤공기를 휘감았다. “손님의 거문고 솜씨가 천하의 일품이네요!” 족히 넘어 보이는 주지스님이 혀를 차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아씨가 누구인지 아시고 하는 말씀이세요?” 옆에 있던 이생이 노복(奴僕·사내종)의 모습으로 어깨를 으슥해 보이며 주지스님의 말에 끼어들었다. “이 아씨가 누구신가요?” “예 우리 아씨는 그 유명한 명월(明月) 아씨예요. 그런데 지금은 해어화(解語花·말하는 꽃·기생)가 아니에요...” 주지스님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어쩐지 거문고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어요! 거문고를 타면 중국 장강(長江)에서 흑두루미가 날아온다는 현학금의 따님이신가요?”라고 말하며 몰라봐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어머님에 비하면 이 진이는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조용히 수행하시는 주지스님께 속세의 바람을 불어 넣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동창이 밝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아닙니다. 소승도 출가하기 전엔 송도의 한량이었지요! 그때 현학금의 거문고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진이는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주지스님이 생사를 모르는 어머니 얘기를 하여 지금 당장 떠나고 싶으나 산사(山寺)의 밤이다.

진이는 ‘잘 쉬고 갑니다. 송도에 오시면 명월관을 한번 찾아오세요.’라는 쪽지를 남기고 여명이 밝자 주지스님에게 인사는 않고 떠났다. ‘송도에서 놀았다’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서 하루 이틀 더 쉬었다 떠나려 했었으나 서둘러 금강산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말 등에 오른 진이는 이인로의 《매화》(梅花)를 떠올렸다. ‘고야산(姑射山·신선이 사는 곳) 신선의 얼음 같은 살결 눈으로 옷 지어 입고/ 향그린 입술에 새벽이슬 구슬을 마시네./ 속된 꽃술들이 봄에 붉은 빛으로 물듦을 못마땅하게 여겨/ 요대(瑤臺·신선이 사는 달)를 향해 학을 타고 가려하네.’ 그랬다. 진이의 마음이 평정을 잃을 때는 늘 시를 떠올려 거문고 선율에 의지했었으나 말 등 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진이의 독특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하였다. 진이의 노래는 절창 이사종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금강산을 향하는 말 위가 아니라면 거문고를 타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꽉 막힌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생은 말을 천천히 몰았다. “형님, 제 허리를 꼭 잡으세요! 길이 험해 말 등이 요동이 심합니다...” 진이는 느슨하게 잡았던 이생의 허리에 힘을 넣었다.
 
늦가을의 새벽바람은 제법 쌀쌀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속까지 텅 비어 오한이 솔솔 몰려오고 있다. “형님 추우시죠? 조금만 더 내려가면 주막이 있습니다. 올라올 때 봐 두었지요!” 이따금씩 몸서리치는 진이의 몸 흔들림을 이생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여명이 밝고 아침 해가 새벽안개를 걷었을 때 주막에 도착하였다.

산에서 먼저 내려온 사람들은 벌써 국밥을 먹고 주막을 떠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주모 여기 고기도 넉넉히 넣어 국밥 두 그릇과 모주 두 잔도 주시게...” 이생이 진이를 안아 말에서 내려놓고 성큼 주막으로 들어가 국밥을 시켰다. 돈이야 진이가 내지만 필요할 때 필요한 행동을 해주는 이생이 고맙고 같이 오길 참 잘 했다고 생각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도 또 그런 생각을 하였다.

밤엔 때때로 잠자리 상대가 돼주고 낮엔 충실한 노복 행세를 해주니 입안의 혀가 따로 없음이다. 국밥 한 그릇에 모주 한 잔은 산에서 내려온 그들에겐 더 이상의 성찬이 없다. “너는 모주 한 잔 더 하려무나!” “아닙니다. 한 잔으로 족합니다.” 남장한 진이의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여자 아냐? 하는 표정들이다. 진이와 이생은 따가운 시선을 등 뒤로 하고 주막을 총총히 나와 말 등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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