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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보릿고개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기사입력 2020-04-08 11:00     최종수정 2020-04-08 11:06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아홉 살쯤 된 한 신동(神童)이 ‘보릿고개’란 옛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다. 보릿고개를 알 리가 없는 아이가 어쩌면 그리 구성지게 잘 부르는지 감탄하였다. 이 노래에는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草根木皮)의 그 시절, 한 많은 보릿고개여~”란 노랫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보릿고개란 보리 수확 하기엔 아직 이른, 그래서 양식이 다 떨어져 먹고 살아 넘기 어려운 1950년대의 음력 4월 경을 말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동네 사람들도 봄이면 초근목피를 먹었다. 쑥 같은 산채(山菜)의 잎을 뜯어 먹는 것은 물론, 냉이, 달래, 무릇처럼 풀의 뿌리, 즉 초근(草根)까지도 캐먹었다. 나도 여러 번 먹어 본 무릇(Scilla scilloides)은 양지 바른 곳에 자생하는 백합과 식물인데 풀잎과 함께 마늘보다 작은 구근(球根) 부위를 쪄 먹는다. 구근은 찌면 갈색으로 변하는데 맛이 아릿하면서도 달짝지근하다. 지금은 별미로도 안 먹을 맛이지만 당시에는 시골에서 제법 애용되는 구황(救荒)식품이었다.

그러고 보면 단군신화에 나오는 마늘은, 누군가의 주장처럼, 실은 무릇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의 껍질, 즉 목피(木皮)로는 봄에 작은 소나무의 웃자란 맨 윗 줄기 부분의 외피를 칼로 벗긴 후 쪄 먹는다. 무릇과 함께 채반에 올려놓고 솥 안에서 물을 끓여 수증기로 찐 다음 흰색 내피 부분을 이빨로 벗겨 먹는다.

이걸 우리 동네에서는 송기(松肌)라고 불렀다. 송기는 질겨서 껌처럼 오래 씹어야 겨우 씹히는데, 씹은 다음 아깝다고 삼키면 소화가 안되어 변비에 걸리기 쉽다. 변비에 걸렸을 때 용변 시 힘을 주면 항문이 찢어지기도 한다. 옛말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그래서 생긴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집은 좀 낫게 사는 편이라 무릇과 송기를 별식(別食)삼아 먹었지만, 이걸 계속 먹다가 영양실조로 부황(浮黃)이 나서 죽거나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황이란 오래 굶주려서 살가죽이 들뜨고 붓고 누렇게 되는 병을 말한다. 오래 굶은 사람은 먹을 것을 보면 허겁지겁 먹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에게 “좀 천천히 먹어라, 짜구 날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짜구(자귀의 사투리)란 갑자기 너무 먹어서 잘 걷지도 못하고 뒤뚱거리는 상태를 말한다. 나는 사람이 짜구가 난 것은 못 봤지만 개가 짜구가 난 것은 본적이 있다. (당시엔 개도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보릿고개를 경험했던 우리는 지금은 너무나 잘 먹어 비만이 문제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방송마다 맛있는 음식 만들기, 맛 집 소개, 먹고도 살 안 찌기 등에 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어쩌면 세상이 바뀌어도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최근 윤서인이라는 작가가 어느 신문에 “오랜만에 찾아 온 조국” 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만화를 보았다. 거기에 “세계 최고의 나라라는 미국보다도 더 나은 점이 많은 자랑스러운 조국! 평균수명, 치안, 위생, 수질, 도시 인프라,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죽겠어, 힘들어, 정치가 개판, 나라가 개판, 불지옥, 이것도 나라냐, 헬 등 한국이 얼마나 살기 힘든지 성토하는 모습! 저렇게 죽는 소리들을 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 물론 삶이 어려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다같이 죽는 소리를 하는 것이 뭔가 납득이 안돼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는 “예전에는 조국이 잘 살기를 기도했었는데 이제는 조국 국민들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기도해야겠어요”라는 끝말로 만화를 마무리하였다. 

그의 끝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어 초근목피를 먹던 사람들이 하나님 은혜로 이만큼 배불리 먹고 살게 되었는데, 감사는커녕 오히려 더 심한 불평불만을 토해내며 살다니, 생각할수록 하나님 앞에 송구하고 민망할 따름이다. 겸손한 자세로 주신 축복을 감사하게 받을 수는 없는 일일까? 언제쯤 우리는 불평불만이라는 새롭고 더 험한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코로나 난리 중에 옷깃을 여미고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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