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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인생 네비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기사입력 2020-03-25 10:49     최종수정 2020-03-25 10:49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요즘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대부분 네비게이터(이하 네비)를 이용해 길을 찾는다. 네비에 중독이 된 나는 심지어 시내에서 우리 집으로 갈 때에도 습관적으로 네비를 켠다. 요즘 네비는 목적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최단경로)과 가장 편한 길(추천경로)을 보여주며 선택하라고 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네비가 왕도(王道)를 알려주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길을 안내해 주는 인생 네비까지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인공 지능을 연구하는 과학자 중에 인생 네비를 개발하려는 사람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유전적 특성과 그가 처해 있는 환경 등을 입력한 다음 그가 인생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입력하면, 그 목표에 이르게 해주는 왕도가 제시되는 그런 네비를 꿈꿀 것이다. 반대로 유전적 특성과 환경을 입력하면 그 사람의 미래 모습이 제시되는 네비의 개발도 꿈꿀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 네비는 개발될 수도 없고, 개발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예컨대 어떤 어린이가 자기가 사십도 되기 전에 죽을 유전적 특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가 있어서 현재까지 유전자 검사를 극히 제한적인 용도로만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생은 유전적 요인들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단순한 시나리오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유전자 가위를 통해 유전자를 편집함으로써 인생 자체를 편집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지만, 이 역시 극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의 하나, 인생 네비가 개발되는 날이 온다면 이는 축복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대 재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또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인생 네비를 파는 곳이 있다면 비싸도 한번 사용해 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약대 2학년이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네 인생의 목표는 정했냐? 나는 스무살에 목표를 정하고 살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그날 그날 살고 있던 나는 그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워낙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를 사신 분이라서 ‘어떻게든지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공부시켜야겠다’는 일념을 가지셨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직업도 몇 가지 없어서 직장을 선택하기가 나보다는 훨씬 쉬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철이 들어 인생의 목표를 정하셨다니, 내가 사는 태도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자괴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내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답은 물론 답 비슷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훗날 깨달은 것이지만 무얼 생각해 보려면 생각에 사용할 재료들이 내면에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재료들이 내 안에 없었던 것이다. 밀가루 없이 국수를 뽑으려고 한 셈이다. 

그렇다면 생각에 사용되는 재료란 무엇일까? 아마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이로부터 얻어지는 지혜 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 재료 하나 없이 그냥 생 고민만 하니 생각이 공상과 망상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주변에 길을 묻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물론 물어봤자 상대방은 대개 무책임하게 조언하거나,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답할 따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이 자신의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인생을 훈수할 수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위아래를 구분 말고 여기저기 물으라고 권한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묻고 듣는 와중에, 상대방의 조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에 지혜가 만들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인생 네비는 유전 특성이나 인공지능이 아니라 각자 마음 속의 지혜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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