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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서열(序列)과 질서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기사입력 2018-03-28 09:06     최종수정 2018-03-28 09:06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몇 해 전 재미있는 건배사를 하나 배웠다. 그것은 잔을 들고 짧게 “얘들아, 마시자” 라고 외치는 것이다. 참석자들이 이에 호응하여 “예, 형님”, 또는 “예, 오빠”라고 외치면 상황 끝이다.

그러면 참석자들, 특히 “얘들아!”하며 건배사를 외친 사람은 자기가 무슨 조폭(조직폭력단)의 우두머리 (그들 말로 ‘형님’)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야릇한 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얘들아”를 외치고 다닌다..

1967년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학생이 갑자기 강의실 단상에 올라가더니 ‘나는 여러분과 입학 동기이지만 이런 저런 사유로 몇 살 더 먹었으니, 나를 야! 자! 하며 부르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하였다. 그 후 우리들은 그를 ‘형’이라고 부름으로써 오늘날까지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처럼 사람을 만나면 누가 형 (또는 언니)이고 동생인지 서열부터 정해야 한다. 서열이 결정되면 연하(年下)인 사람은 연상(年上)인 사람을 ‘형님’ 또는 ‘선배님’ 이라고 부르며 대우를 해야 한다. 만약 연하인 사람이 슬슬 반말을 트려고 나오면 연상인 사람은 금방 심기가 불편해 진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도 좋은 방향으로 진전되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우두머리나 형으로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진짜 나이보다 몇 살 더 먹었다고 속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다가 운 나쁘게 주민등록증이 공개되어 진짜 나이가 들통(?)나면, 예외없이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그렇다’고 둘러댄다.

나는 한 해 재수(再修)해서 대학에 들어 갔기 때문에 고등학교 1년 후배들하고 같은 학년이 되었다. 후배들은 고래(古來)로 당연한 관습에 따라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1살 빠른 7살에 초등학교에 들어 갔기 때문에 일부 후배와 나이가 같았다.

어떤 후배는 나보다 생일이 빨라 실제로는 그가 몇 달 ‘형’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 후배들이 나를 ‘형’이라고 부를 때면 은근히 마음이 거북하였다. 그래서 그런 후배들하고는 지금까지 서로 야! 자! 하지 않고 올림 말도 내림 말도 아닌, 문자 그대로 ‘반말’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고 있다.

서열이 중요한 것은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 자식 간에는 물론이고, 형제 남매 간, 동서 간 등에도 서로 서열에 합당한 말을 사용하여야 한다. 가족 간에는 나이에 앞서 어떤 관계인가가 서열을 결정짓는다. 자식은 부모님께 경어를 써야 하고, 제수(弟嫂)는 나이 적은 형수(兄嫂)에게도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집안이 제대로 돌아 가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서열이 가장 엄격한 곳은 아무래도 군대와 직장이다. 거기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누가 계급이 높으냐, 누가 상사(上司)이냐가 서열을 결정한다. 그렇다고 나이나 관계 등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내가 사병으로 군에 복무할 때, 이종사촌 동생의 친구가 우리 부대에 ROTC 소위로 부임하였다. 당연히 나는 그를 상사로 모셨지만, 그는 나를 제 친구의 형님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 그 죄(?)로 그는 지금까지 내 기억에 인간성이 별로인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서열 사회, 즉 누가 형이냐, 어른이냐, 상사이냐에 따라 사람의 서열이 결정되는 사회는 일견 불합리해 보인다.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한데, 왜 자식은 부모에게 경어를 써야 하고, 동생은 형의 말을 들어야 하며, 왜 젊은이는 어르신에게 공손해야 하고, 부하는 상사를 깍듯이 모셔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사회의 서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그런데 세상살기는 전에 비해 오히려 더 각박해졌다. 오죽하면 나이 좀 먹었다고 젊은이를 훈계하다가는 큰 화를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겠는가? 비굴하게 살아야만 안전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돌이켜 보면 적절한 서열은 우리 사회의 질서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질서의 파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면, 서열 파괴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얘들아, 안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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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히 공감합니다..건배사 배우고 갑니다.."얘들아, 마시자~~~"
(2018.03.28 09:17)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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