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정착한 한국인 약학자의 인생편린 <3>

<특별기고> 최영해 교수 / 네덜란드 Leiden대학 Institute of Biology (IBL)

기사입력 2021-03-02 05:51     최종수정 2021-03-02 08:45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튜울립과 물,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 
그러나 나에게는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는 치열한 삶의 터전…

시작이 반? 시작은 시작일뿐!

드디어 이 곳에 온지 7년여만에 본격적으로 Leiden 대학의 교직을 알아보기로 한 나로서는 뭔가를 준비해야했는데 정말이지 막연했다. 딱히 자리가 난 것도 아니였고 (심지어 있던 사람도 나가는 판에) 그렇다고 그런 자리들에 지원해봤던 경험이 내게 있던 것도 아니고 누가 든든하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냥 나만의 생각 또는 욕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차 몇가지 일들이 한번에 나에게 일어나게 됐다. 다행히 나에게는 모두 좋은 방향으로… 

우선, Leiden 대학으로 복귀하니 구조조정, 특히 인적 구조조정이 다 끝나 다른 세부사항들을 IBL에서 해결하려 했다. 먼저 장소의 문제, 내가 속한 생물학과 (Institute of Biology, IBL)의 주건물에 모든 연구그룹들을 모이게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그룹들이 그 주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몇몇 연구실들은 아직 다른 단과대학의 건물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한데 불러모아 비용도 절감하고, 생물학 분야간 상호교류를 유도하는 것이 구조조정의 다음 과제였다. 

내가 속한 천연물 (Natural Products Research and Metabolomics) 연구실도 그 이사해야 하는 그룹중 하나였는데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Verpoorte 교수님이 그때 당시 거의 정년이 다 되셨기 때문에 우선 그 연구실을 교수님 은퇴 후에도 Leiden대학에 남겨야 되는냐 아니면 다른 분야로 공채를 해야 하는 가를 대학이 결정해야 했다. 이 곳 네덜란드 대학에서는 대부분 어느 교수가 은퇴를 하면 같은 주제로 다음 후계자를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주제로 - 채용 당시 해당 학문의 선도성 및 추세를 고려하여 - 새 교수진을 임용한다. 

사실 구조조정 당시 우리 연구실은 다른 연구실에 비해 조금은 약한 구조조정 대상이었다. 단순히 비연구진 (비서, Technician) 들을 내보내는 선에서 마무리 된 이유가 Verpoorte 교수님이 이미 거의 정년이 다 됐기때문에 어차피 몇년안에 자연적으로 정리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천연물 연구실을 한 건물로 옮긴다는 것은 앞으로 Leiden대학이 이 연구실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려울 것이라 봤는데(솔직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전혀 예상과는 달리 대부분의 IBL 교수들이 우리 천연물 연구실이 남기를 원했다. 

아무래도 그 동안 많은 공동연구를 진행해왔던 게 크게 주효했었나 보다. 특히나 식물 생태학 (plant ecology), 미생물 연구실 등이 아주 강력하게 우리 연구실의 존속을 원했다. 그렇게 유지한다고 결정된 다음에는 과연 누가 그 연구실의 주건물로의 이전을 주도하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전’이라고 간단히 말하지만, 물리적으로 기기들을 옮기는 것 뿐만이 아닌, Verpoorte 교수님 은퇴후 남아있던, 자료, 학생, 연구원들을 별 문제 없이 이전 시키는 것도 포함된 조금 더 방대한 개념이었다. 결국 큰 이견 없이 그 것을 내가 맡기로 했다. 

두번째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일어난 일은, Leiden 도시의 정책에 관련되어 있다. 네덜란드에서 Leiden이 역사적으로는 오래된 도시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후 산업화 과정에서 성장 동력을 잃고, 다른 유럽 여타의 다른 대학 도시처럼 그 위상을 교육에 국한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몇십년 전부터, 점점 도시 한편에 바이오 산업단지를 유치하여, 방향성을 정하더니, 얼마전부터는 최근 생물학 뿐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화두로 대두되는 ‘Biodiversity’를 도시 발전 정책의 하나로 정하게 된다. 사실 Leiden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미 Leiden에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 중의 하나(Hortus Botanicus)와 자연사 박물관(Naturalis)이 있어, Biodiversity 연구 및 그 기반으로 산업화를 도모하기에 최적화된 도시였다. 

Hortus Botanicus 앞 전경 (1). Hortus Botanicus내에 있는 von Siebold 동상 (2). Hortus Botanicus, von Siebold 일본식 기념 정원 앞 (3). Hortus Botanicus내에 있는 건물 벽에 써있는 일본시 (4). 
Leiden의 Hortus Botanicus 식물원은 유럽내에서도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식물원으로 (1587년 개관), 식물 이명법의 창시자, 스웨덴의 Linneus도 이곳에서 방문 연구를 한 적이 있였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Philipp Franz Von Siebold는 많은 한국, 일본 식물의 명명자로 그의 콜랙션이 이곳에 보관되어있다. 그는 원래 독일의 내과의사였으나, 여행을 좋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동식물군을 연구하는 것을 취미로 하였다. 그러다 우연찮게 1822년 네덜란드 군의관으로 복무하게 되고, 그 후 모든 그 당시 네덜란드령 식민지들을 방문해 각지의 생물상을 연구하게 된다. 그 후 1823년 일본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본업인 의술과 관심사인 식물학을 연구였고. 그 후 Leiden으로 돌아와 가져온 식물 콜랙션을 Hortus Botanicus에 보관하게 된다. 그 후 이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일본관련 행사가 이 곳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 속에 보이듯 (4) 몇 십년 전부터 Leiden 시는 환경 미화 차원에서 많은 건물 벽에 세계 각국의 시를 써 놓는데, 이 곳 식물원 (Hortus Botanicus)은 일본과 연관이 많은 관계로, 건물 내부 벽에 일본 하이쿠를 써 놓았다. 아직 한국시는 못 봤았는데, 곧 조만간 소개하지 않을 까 기대한다. 

그러다 우리 대학에 우연찮게 Leiden 시장이 방문하게 된다. 아마도, 도시의 미래 정책이 Biodiversity 와 관련있으니 생물학과를 보고 싶어했었나 보다. 그 방문이 결정되니 자연대학장, 생물학과 학장 등이 - Leiden 대학의 자연대에는 IBL을 비롯 물리학과, 화학과, 약과학과등이 함께 속해 있어 우리의 개념으로 보면 생물학과 학장이 우리의 학장에 더 맞고, 자연대 학장은 총장과 단과대 학장 그 사이쯤 된다 - 모두 모이게 되었고 그 때 시장에게 방문동안 어느 분야를 보고 싶냐고 했더니 천연물 관련 연구실을 보고 싶다고 했다. 

천연물실 담당자로 그 모임에 참석했는데, 시장이 많은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했고 나는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그때 아마도 모든 사람 (학장, 단과대 학장, 부학장을 포함해서)이 우리 연구실의 존속을 결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그 당시 너무나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고 또 오래되다보니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나 뒤의 일에 영향을 주었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여하간 많은 일이 일어났고 또 모든 것이 나에게는 좋은 방향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연구실 이전이나 시장의 방문은 사실 외부요인이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연구 중 하나가 국내외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Natural Deep Eutectic Solvents (NADES). 

내가 TU-Delft에 있을 당시 발견한 현상(사실 발견이라기 보다는 자연에 존재할 수 있다는 하나의 가설)이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NADES라 명명한 논문 이후 수 많은 연구 논문들이 다른 연구진에 의해 후속 연구로 발표되었고 응용분야로써 많은 회사들이 관심을 보였다. 특히 Verpoorte 교수님이 열심히 알리고 더 발전시킨 덕분에 특허 출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프랑스의 한 회사가 우리 특허권의 일부를 사 로열티를 지불하게 되었다 (다른 여타의 대학과 마찬가지겠지만, 특허 출원시, 1/3은 대학, 1/3은 학교내 특허사무서, 1/3은 발명자에게 돌아간다). 그 동안 수 많은 특허가 IBL에서 출원하였으나 실제 로얄티를 받은 것은 극히 드물었는데, 우리의 NADES 특허가 그 중 하나였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 사실 가장 중요한 내 전공관련 자리가 IBL에는 없었다. 그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식물 생태학 연구실의 Klinkhamer 교수가 우리 연구실의 필요성을 IBL에서 알리고 다녔으나 공식적으로 공고하는 자리들은 모두 생물학 관련 분야 (미생물학, 식물 분자생학 등)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할 일도 다 했으니 Leiden 대학을 떠나려 했다. 또 다시 5년 후 강제로 떠나야 하기전에… 사실 그때 몇몇 대학에서 공식 제안도 있어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학교 반응은 전혀 예상과 달랐다. 나는 그 전까지 학교가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었는데 - 시장의 방문이든 다른 연구실과의 공동연구든 또는 내 NADES 연구등의 이유에서건 - 내가 그렇게 선언한 후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 특채로 나를 뽑겠다고 했다. 일반적 네덜란드 규정상 3년 이상의 계약기간을 포함하는 어떠한 자리도 공채를 의무화하고 있다 (2-3달 이상의 공식적 공고 후 채용).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아주 특별한 예외로 거의 바로 즉시 특채가 이루어졌다. 

내 기억으로는 1주일도 채 안걸린 것 같다, 다른 여타의 채용 과정이 2차의 면접을 포함한 몇달의 시간이 걸리는데 비해 극히 이례적으로 짧았다. 더 파격적인 대우는 공식적으로 정년보장 (tenure)을 받기위해서는 5년의 기간이 필요했으나 나의 경우에는 3년으로 줄여 주었다. 지난 2년의 연구성과를 인정해 준 것이었다. 이것도 아주 예외적이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나 미국과는 달리 이 곳 네덜란드 대학에서는 docent - hoofddocent - professor의 직위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assistant professor - associate professor - professor로 번역할 수 있지만 크게 다른 점은 docent (assistant professor)부터 이미 정년보장을 해 주었으나, 최근들어서는 미국등과 마찬가지로 assistant professor는 채용후 5년의 tenure track 기간을 가져 그 후 업적 평가를 통해 정년보장 심사에 들어간다. 

따라서 현재 이 곳에서는 hoofddocent (associate professor)부터는 정년이 보장된 자리이다. 그러나 실제로 각 대학해서는 신구체계가 섞여, 어떤 교수는 조교수인데도 정년보장되어있고 어떤 교수는 여전히tenure tracker인 경우가 아직도 많이 있다. 

3년의 기간 동안 업적 평가 준비를 해야했다. 기간이 줄어 좋기는 했으나 문제는 남들보다는 짧은 시간에 그 만큼의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량적 잣대가 있었으면 한결 수월했겠으나 누구도 무엇을 얼마나 무었을 해야하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연구비를 될수록 많이 가져와야 한다는 것, 그러나 얼마 만큼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또 그 tenure track 기간동안 그냥 편하게 연구나 강의하게 놔두지 않았다. 젊은 교수 training 이라는 명목하에 각종 의무과정을 이수해야했다. 학생도 아닌 교수가! 예를 들어 발표하는 기술적 방법을 연극배우 지도 선생에게서 제스춰, 표정, 스텝등을 배웠고, 심리상담사에게서 학생을 다루는 방법을, 전문 작가에게서 연구제안서 작성 방법등을 배워 이수 학점을 확보해야 했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간 동안 교육부 공인 네덜란드 공인 교사 자격증을 취득해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자격증을 가장 어려워했다. 다행히 나는 네덜란드에 도착하자마자 많은 과목에서 학부 강의를 했었던 관계로 강의기록과 학생들의 평가가 자료로 남아 있어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그 자격증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 교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대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초중고등학교의 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의마하기도 해 tenure tracker들의 강의 능력 평가자료에 사용된다. 

이 기간이 아마 네덜란드에서 육체적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주위에서 정년보장 심사에서 많이 탈락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도 컸었고... 마침내 3년후 모든 업적을 모아 우선 내가 속한 단과대학 IBL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IBL에서 자체 심사후 (이 과정에서 많이 탈락한다), 학장이 의견을 모아 Leiden 대학 본부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마음 졸인 몇개월 후 학장으로 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정년보장을 축하한다는 편지와 함께. 그러나 내 인생의 가장 극적인 Momentum 중 하나였을 그날이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뭘 했고,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어땠고, 그 날 저녁 뭘 먹었고 등. 그냥 팽팽한 풍선이 바람이 빠지듯 스르르 내 몸이 바닥으로 녹아내렸다는 기분만이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 곳에 도착한지 10여년이 지난 후 마침내, 뭔가를 가졌지만, 그 기쁨 보다는 그냥 목이나 가슴을 조이고 있었던 목줄이나 사슬이 사라진 느낌?

힘들게 산위에 올랐더니 다른 봉우리가 보인다
2005년 핀란드 헬싱키 해변에서 Verpoorte 교수님과 함께 (1). Leiden IBL 식물 생태학 Klinkhamer 교수님 (2).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갈 때는 방해도 없지만 도움도 없다고 했는데, 사실 도움없이 갈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으랴! 두 교수님은 내가 이 곳 네덜란드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 양면으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내가 네덜란드에서 혹시라도 이룬 것이 있다면 이 두 분의 도움이 결정적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나의 그릇을 만들어 준 게 Verpoorte 교수님이고, 그 그릇의 내용을 채워 준 것이 Klinkhamer 교수님이 아닐까 한다. 두분 교수님 과는 20년 가까이 아주 가깝게 지냈으나 막상 같이 있는 사진을 찾으려 하니 몇장 없다. 심지어 Klihkhamer 교수님과는 같이 찍은 사진이 단 하나도 없다. Verpoorte 교수가 현역에 계셨을 때는 매년 수 차례씩 강의 여행을 세계 각국으로 함께 여행하고, 은퇴 후에도 지금까지 매일 만나고 전화할 정도로 가까운데도 사진은 몇장 없다. 아마도 너무 가까와서 함께 있는 사진의 필요성을 못 느꼈나 보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Verpoorte 교수님은 정말 장신이다, 신장이 2m에 가까운데 (정확하게는 195 cm), 한국 같으면, 농구나 배구선수를 해도 작은 키가 아닌데, 이 곳에서는 190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얼마전 통계에 따르면 네덜란드 평균 신장이 전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남자 평균 184 cm, 여자 174 cm). 이렇듯 유전적으로 체격이 좋다 보니 올림픽이나 각종 세계 선수권 등에서 딱히 전문 선수가 아니더라도 많은 아마추어 선수들이 상위입상에 오른다. 얼마전에는 Leiden 병원 인턴의사가 아마추어로 조정경기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생활 체육이 강하다. 
이렇듯 신장이 크다 보니 한국에서도 작은 키에 속하는 나로서는 처음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우선 모든 대화에서 올려다 보니 목이 항상 뻐근하고 화장실 거울이나 소변기가 높이 달려 있어 그 것들을 제대로 이용하려면 항상 키발을 딛고 일어서야 했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20여년 가까이 이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내 작은 키는 생각하지 않고 한국에 갔을 때 모든 것이 낮게 달려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어색하다. 

일생의 어느 순간에서나 사람들은 목표가 있다. 그게 금전적이든 지위에 관한 것이든 또는 학문적이든 목표란 엄밀한 의미로 그 것을 이루었을 때 더이상의 것은 필요없는 궁극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니 사실 주위 환경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는다. 목표가 그 이루진 시점에서는 어느덧 이전의 목표는 과정 중의 이정표 (milestone) 로 바뀌어 다음의 목표로 움직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게 된다. 

20여년전 빈손으로 한국에서 쫒기듯이 이 곳에 도착한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살아가기 급급한 나에게는, 그런 호사스런 인생의 목표같은 것은 없었다. ‘지금 살자, 그리고 내일을 위해 살아남자’. 이게 다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가 만일 정년보장을 받으면 정말 편안하게 살 수 있을테데라고 생각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도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목표를 이룬 지금 또 다른 것이 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년보장이 되더라도, 연구비는 또 다른 문제다. 세계 어느 나라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도 연구비 경쟁이 치열하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각종 개인 연구과제, 공동연구가 네달란드 정부 또는 EU 주도하에 공고되며 어느 하나 경쟁률이 만만한게 없다. 대부분이 3% 이하의 확률을 갖고 있으며, 해가 갈수록 그 어려움은 더욱 심해진다. 

더군다나, 나 같이 박사학위를 이 곳에서 취득하지 않고 한참 후에서야 연구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인적 network의 한계를 여실히 느낀다. 누군가에게 내 연구를 알리는 것 없이 연구비를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그 한계를 절실히 느낀다. 또 어느 연구실이든지 다른 분야나 다른 학교의 사람들과 공동연구를 해서 연구과제를 확보해야하는데 이 인적교류기반이 취약한 나에게는 또 다른 가시밭길이 남아있었다. 

물론 정년보장은 은퇴까지 학교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라나 그 것이 연구생활의 질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 질을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연구비를 국가나 회사로부터 확보해야한다. 그 확보된 연구비를 바탕으로 학생이나 연구원을 고용할 수 있으며, 그 확보된 연구진을 바탕으로 연구논문을 발표할 수 있다. 요즘의 대학들은 신규 교원채용시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earning power 즉 연구비 확보 능력이다. 그런데 사실 이 연구비 확보 능력이라는 것이 단순 종목의 수치평가가 아닌 종합적 평가이다. 다른 여타의 업적평가인 연구논문, 학생지도능력은 종국에는 이 연구비 확보 능력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연구비없이 논문, 학생을 확보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어느 연구실도 연구비 신청서를 제출했을때 100% 확신하는 곳은 없다, 대개 3% 많아야 10%. 따라서 어떤 때는 연구비가 넘칠듯 많고 어떤대는 완전히 마르고… 마치 그 예전의 춘궁기와 수확기를 오가는 우리 선조들처럼.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내 연구의 30-40% 정도는 회사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아무래도 회사연구비는 크지는 않지만 안정적으로 들어올 수 있기에 연구비 춘궁기를 조금은 면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개 회사의 연구과제라는 것이 기술적 주제에 연관된 것이 많은 관계로 항상 그 점을 유념하고 경쟁력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도 크다. 

연구비 다음으로 힘든점은 학생수급의 문제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박사과정 학생의 생활비 및 학비를 (박사과정의 경우 tuition fee가 있다) 전적으로 지도교수가 책임져야한다. 기본적인 인건비가 1인당 박사과정의 경우 대략 연간 50,000 euro, 박사후 연구원의 경우 60,000 euro 이니, 3-4년 100만 유로의 아주 큰 연구비를 확보하더라도 실제 가용인원은 3-4명 정도 밖에 되질 않으니, 모든 교수들에게 있어 이 인건비 문제가가장 큰 스트레스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더군다나 예전과는 달리, 교수 1인에게 제공되는 연구원 자리는 초기 start-up package에 포함된 박사과정 학생 1-2명 이외에는 비서나 technician 등이 거의 제공되지 않아 모든 경비는 자비 (연구비)로 해결하여야 한다.

학교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세 어찌보면 정년보장은 인생의 목표는 아닐지라도 마지막 관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관문을 통과했음에도, 보장되는 것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단지 그 것뿐이다. 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행복하게 (아니 다른 말로 편안하게) 사는 것은 또 다른, 아니 더 힘들지도 모르는 더 큰 관문일지 모른다.

그 남아있는 또 다른 허들을 넘기위해 정년이 보장된 사람들은 지금도 열심히 연구, 아니 살아남으려 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로 매번 실패를 거듭하면서, 일어서고 또 도전한다. 남들은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데 그 것은 그냥 남의 실패에 듣기좋은 위로의 소리이고, 그 것이 나에게는 일어났을 때는 아주 쓰디쓴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특히나 나처럼 생면부지의 타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실패는 더욱더 그 쓴맛이 깊다. 그래도, 실패가 책에 있는 것처럼 다음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 되지는 않을지라도,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거나 다음 실패에 면역성을 제공해 주기는 한다. 물론 약간의 현명함도 주면서… 지금의 자그만한 성공이 내일을 보장 못하며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그 쓰디쓴 실패라는 것을 오늘도 배워나간다. 인생은 마치 많은 실패로 점철된 길 속에 가끔 작은 성공속에 아주 잠시 쉬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맺으면서 

오래전에는 가까운 친구들이나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항상 장난삼아 끝맺는 말로 ‘이국 땅에서 과학적 진리에 밤낮을 잊고 매진하는 젊고 가난한 과학자가…’를 서명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 이후 몇년이 지나니 ‘젊고’가 사라지고, 나이가 드니 몸도 예전 같지 않아 ‘밤낮을 잊고’를 없애고, 세파에 또 시달리다 보니 ‘과학적 진리’, ‘과학자’ 같은 말도 사라지고, 그래도 좋은 점은 월급은 꼬박꼬박 받으니 ‘가난한’도 없애고 이제 내게 남은 건 단지, ‘이국땅’…

이국땅에서의 생활이란 것이 70, 80년대 예전 선배들에게서 듣던 그런 어디 TV다큐멘터리에서나 봄직한 힘든 점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낯설음이 마냥 신기함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항상 내가 사석에서 하는 말이 타국에서의 생활은 9년 주기를 겪는다는 것이다. 처음 3년간은 모든 것이 그간 살아왔던 곳과 너무 달라 그 신선함에 취해 살고, 그 후 3년은 그 다름이 낯설고 불편함으로 다가와 외로움이 뼈속까지 시려오고, 그 후 3년은 ‘인생 뭐 별거 있나 사는 게 다 똑같지’ 하고 적응하고. 그러다 또 그 주기를 반복하고. 벌써 이 주기를 2번 겪고 다시 3번째…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한국과 네덜란드 그 어디메? 한국에 휴가차라도 좀 있으면 이곳이 그립고, 이곳에 있을때는 또 고국의 모든 것이 보고싶고, 앞을 보면 뒤가 그립고, 뒤를 보면 앞이 아쉽고…

이제 어언 나이 50을 넘어, 젊은날 하고자 했던 欲心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어 慾心으로 바뀌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感想이 과거에 대한 感傷으로 바뀌는 나이, 뭐라도 해야 됐는데, 이렇게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너무 다행이다. 


2008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딸아이 사진을 촬영하는데 우연히 딸아이를 호기심에 유심히 보는 한 꼬마아이가 같이 찍혔다. 외국생활하는데 가장 걱정되는 것이 아마도 ‘인종차별’일 것이다. 이 곳 네덜란드도 틀림없이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 사람 사는 곳에 차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건전한 사회일수록 그런 차별에 대해 엄격히 규제하고 통제한다. 아주 어릴때부터 학교에서 차별적 단어나 표현에 대해 엄격하게 가르친다. 사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을진데 다 똑같이 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되, 그 다름이 개인이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들 (인종, 성별, 국가 등)에 라벨을 붙이는 것에 대해 업격히 통제하고 또 그 다름이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방해물이 안되게 하는 것이 오히려 건전한 사회로 가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인종차별에 엄격하더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피할 수는 없다. 특히나 조그마한 도시나 시골을 가면, 뒤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사진처럼 사람들이 쳐다본다.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부담이 되었으나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그들이 혹시라도 있을 차별적 행동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고… 

이 글을 요청 받았을 때는 그냥 막연히 내 과거를 곰곰히 또 담담히 반추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쓰다 보니 하나하나의 사실들을 생각해 내고 적시할때 내 주관과 감정이 너무 들어가지 않았나, 내가 혹시 잘못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기억만큼 왜곡되기 쉬운것도 없다고 한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쓰려 최선을 다했으며 이 부족한 기록이 혹시라도 차후에 있을 학생들이나 연구원들에게 자그만한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끝>

<필자소개>
최영해 교수는 1988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학과에 입학 후 1992년에 졸업(46회), 1994년과 2000년에 각각 약학 석사, 박사 학위를 서울대 약대생약학 연구실에서 취득하였다. 그 후 2002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박사 후 연구원, 주임 연구원, 조교수 등을 거쳐 2014년부터 정년보장 부교수가 되어 현재까지 Leiden 대학 Institute of Biology (IBL)에서 재직하고 있다. 30년의 연구 생활 동안 식물화학, 대사체학, 분석화학, 식물생태학, Green Chemistry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여 왔고 현재 이 모든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영해 동문의 부인인 김혜경 박사도 서울대 약대 49회 졸업생으로 최교수와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에서 생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 후 20002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현재 Leiden 대학에 재직 중이다. 슬하에 2006년에 태어난 딸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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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제약산업 100년의 주역

<60> 이정희 <유한양행 대표이사 / 제56회 / 2020년도>

유한양행 이정희 대표이사가 제56회 동암 약의상을 ...

<59> 천병년 <우정바이오대표이사 / 제55회 / 2019년도 >

천병년(千炳年) 우정바이오 대표이사는 신약개발 전...

<58> 한승수 <제일파마홀딩스 회장/ 제54회 / 2018년도>

1959년 창립된 제일약품은 지난해 6월, 미래성장 추...

<57> 윤도준 <동화약품 회장 / 제53회 / 2017년도>

윤도준 동화약품 회장은 고(故) 윤광열 동화약품 명...

<56> 김동연 (한국신약개발조합이사장 / 제52회 / 2016년)

  김동연 한국신약개발 이사장은 1950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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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 고대정형외과 교수 ‘스페셜 정형외과’ 개원

고대병원 정형외과에서 30년이상 재직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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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판 한국제약바이오기업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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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판 한국제약바이오기업총람은 상장(코스닥/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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