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정착한 한국인 약학자의 인생편린 <2>

<특별기고> 최영해 교수 / 네덜란드 Leiden대학 Institute of Biology (IBL)

기사입력 2021-02-26 09:19     최종수정 2021-02-26 17:2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튜울립과 물,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 
그러나 나에게는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는 치열한 삶의 터전…

한달 가까이 지나 긴 여행에서 돌아오신 Verpoorte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마침내 내 연구 주제를 들을 수 있었다. 원래 가려던 Swiss Lausanne 대학에 갔었으면 주임교수님을 따로 만나지 않았어도 내가 뭘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었지만, 갑자기 이 곳으로 오게 되는 바람에 뭘 할지 사전에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마침내 얻은 주제는NMR을 이용한 ‘Metabolomics’! NMR도 잘 모르는데, 처음 들어본 Metabolomics라니, 대사체 (metabolite)와 관련돼 있는 것은 같은데 뭘하라는 건지… 

우선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1년, 아니 한달을 그냥 보냈으니, 남은 시간은11개월, 뭔가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 시작하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이 없었다.첫 대면한 교수에게 다른 주제를 하고 싶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래도 어떻게든 주어진 과제를 흉내 내려면, 그 두 키워드 (NMR, Metabolomics) 중 뭐라도 하나는 잡고 연구를 시작해야 했다. 그 중 그나마 나에게 조금이라도 친숙한 NMR을 선택해서 우선 작은 연구를 시작해 보기로 하였다. 

그래도 천연물을 했으니, NMR 스펙트럼을 몇번 접해 봤었다는 경험을 믿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우선 NMR실에 찾아가 technician에게 내 사정을 짧은 영어로 더듬더듬 설명하고 - 사실 그 당시 정말 많이 후회했었다. 학부나 대학원때 그래도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영어학원에 다녔더라면 그때 설명하는 것이 조금은 나을텐데… 우선 NMR의 기계적 특장점등에 대해서 배워 가기로 했다. 기계가 조금 익숙해지고 나서 간단하게 배운 특성을 바탕으로 간단한 논문을 도착한지 3개월만에 투고하였다.

물론 발표된 시점은 6개월 이었지만. 빠르게 논문을 투고하니 주위 동료들이 그제서야 가까이 다가오며, 자기들 연구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 방안을 하나하나 묻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많은 연구실 동료들이 기기분석 전반을 방과 후 강의 해 줄 수 없겠냐고 나에게 요청해왔다. 그들은 내가 아주 빠른 시간에 NMR에 관해 투고하니, 내가 마치 NMR등의 기기분석 전문가인줄 알았나보다. 

유럽 대학의 대학원 과정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나 미국대학과는 달리 박사과정시작시 이수해야하는 학점이 없다. 있어봐야, 아주 개론적인, ‘과학적 주제 접근법’, ‘표절방지 방법등’과 같은 아주 기초적인 것들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Verpoorte 교수 연구실 처럼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주제를 전공한 학생들은 항상 그런 기초적인 강의에 목말라 했다. 

정말 하기 싫었지만, 아니 싫었던 것이 아니라,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감히 어떻게 영어로 강의를… 그래도 그들이 하도 원하니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두시간씩 두달간 그 기기분석 강의에 매달렸다. 그 당시 낮에는 연구하고 밤에는 강의하는 강행군이 정말 힘들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것이 내가 네덜란드에 계속 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행동이었던 같다. 연구수행, 논문 작성 능력이 아닌, 강의 능력이라니 전혀 생각 치 못한 일이었다. 

사실, 이 것도 운이 좋았다. 내가 지원 한 Verpoorte 교수 연구실은 원래 내가 오기전 Leiden 약대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네덜란드 정부의 의-치-약학 통폐합 정책에 의해 Leiden 대학이 약대를 포기함에 따라, 약대에 속한 다른 모든 그룹들과 함께 약과학 (Biopharmaceutical Science)을 연구하는 LACDR (Leiden Academic Center for Drug Research)로 소속을 옮겼으나, 내가 오기 몇년전 몇몇 문제점들로 인한 갈등으로, 대부분 정치적인 것들, 같은 대학 산하 Insitute of Biology (IBL)로 옮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연구실이 인적 물적면에서 많이 축소 되었다. 당연히 같이 있던 Verpoorte 교수 연구실 소속의 많은 경험있는 과학자들이 떠나게됐다. 그 공백기에 내가 오게돼서 아마도 그 강의를 맡게 된 것 같다. 사실 후에 안일이지만, 이 곳에 오게 될때 이미 천연물 관련 유럽 전역의 대학에 이미 이런 소문이 나서 Verpoorte 교수 연구실이 곧 문닫을 것처럼 남들에게 알려졌었다고 하는데, 나는 하도 급히 오는 바람에 그 사실을 몰랐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 소문을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과연 내가 올 수 있었을까? 비록 1년이지만 그래도 뭔가를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아마 가려 하지 않았을까? 
남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의도치 않게 나에게는 작은 기회가 된것이다. 

더군다나 Verpoorte 교수님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Leiden 대학내 LACDR에서 IBL로 옮기게 되자 학교에서 3년의 포닥자리를 그의 연구실에 배정하였는데 (위로 차원인지 아니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라는 의도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 자리를 나에게 제안한 것이다. 그것도 내가 예정된 1년의 기간이 다 돼 그 방을 떠나기 4개월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공고를 내지 않고 나에게 제안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계획없이 살았던 것 같다. 떠나기 4개월 전까지 전혀 갈 곳을 정하지 않고 있었다니 그래서 교수님의 그 제안에 심지어 ‘생각해 보겠다’라는 의례적인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수락했다. 

사실 1년만 하고 떠난다고 생각했을때는 그냥 그때까지 그 곳에서 발표한 3-4편의 논문들로 대충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막상 3년을 더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처음 요구 받았던 두가지 연구 키워드 중 하나인 Metabolomics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통계학 (statistics)이나 다변량 분석 (multivariate data analysis) 등은 그 당시 나에게는 러시아 소설에서 흔하게 나오는 발음도 안되는 인물 이름들보다 더 생소했다. 도서관에서 관련 책이나 논문도 구해보고 한국의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교과서 위주의 통계학 책도 부탁해서 읽어보았으나,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계속해서 답보 상태였다. 그렇다고 연구실에서 누가 해 본 것도 아니어서 물어 볼 사람도 없고… 

그러다 통계 분야는 심리학과가 강하다고 하기에, 어느 심리학과 교수에게 면담을 약속하고 찾아가 가장 기본인 principal component analysis (PCA)에 대해 약 30여분간 설명을 들었는데, 정말이지 그 때 그 교수님의 설명에 갑자기 막혔던 것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많은 경우, 이해를 요구하는 지식의 습득이라는 것은 투자한 시간에 따라 점차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다가올 수 도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의 Metabolomics 연구도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삶을 돌아볼때, 당신의 지나온 삶 중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였었냐고 누군가에게 물으면 대개는 곧잘 쉽게 대답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머뭇거리거나 대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아마도 행복이라는 것이 고통만큼 자극을 주며 우리 인생에 찾아오지 않기에, 기억에 강렬히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럴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후 몇년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에 원없이 매진하고, 결혼도 하고, 내 소중한 아이도 낳고… 그 기간 내가 가르치거나 도와준 학생이 줄잡아 100여 명은 되었던 것 같다 (유럽대학에서는 많은 연구실이 짧게는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상주하는 방문 연구원이나 학생을 많이 받아 학문의 교류를 실현하려해서 항상 유명한 연구실에는 많은 단기 방문 연구원들이 상주한다.). 

한때는 한번에 8명의 석사과정의 연구를 담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육체적으로는 정말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한 곳으로 원하는데로만 흐르랴! 그때만해도, 앞으로 나에게 닥칠 고난을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마냥 그 행복이 지속될 줄 알았다. 내 자리는 계약직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린체…

혼자가는 길은 방해도 없지만 그렇다고 도움이 있는 것도 아니다

Leiden 대학의Academic gebouw (1). Leiden 대학 박사심사과정 (2). 박사논문 통과후 후보자가 들어가 벽에다 자신의 서명할 수 있는 방 (3). 
Leiden 대학의 박사논문 심사는 대게 6-8명 정도의 심사위원들과 박사후보자 간의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정확하게 45분간). Leiden 대학은 1575년에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학이다. 가장 오래된 대학인만큼 다른 여타의 네덜란드 대학에 비해 많은 경우, 다른 대학에서는, 이미 사라진, 오래된 관습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 하나가 Leiden 대학의 모든 박사 논문심사 (사실 심사 및 학위 수여식을 한번에 겸한다)는 단과대 불문하고 사진에서 보이는 한 건물 (1, Academic Gebouw, Leiden 대학 설립시 가장 먼저 세워진 건물)의 특정방에서만 행해진다는 규정이다.따라서 우스개소리로, Leiden 대학에서 박사학위과정 중 가장 힘든 단계가 그 방을 예약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또 이 심사중 모든 교수 (정교수)들은 중세 복장 Toga를 입고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사진 (2) 속 중간에 앉아 있는 교수가 입고 있는 옷이 정교수가 심사중 반드시 착용하여야 하는 Toga이다. 그리고 사진 (3) 속의 방은 몇백년간 이어온 Leiden 대학의 전통으로 시대와 학과를 막론하고 모든 박사졸업자의 서명이 전체 벽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고용정책은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가능한한 정규직을 줄이고 대신 계약직을 늘리려 하고, 피고용자는 그 반대를 원해왔다. 그 와중에 국가는 그 중간자적 입장에서 서로를 만족시키는 정책을 끊임없이 내놓았다. 네덜란드도 마찬가지로 계약직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총 5년 또는 3번의 계약기간이 지나면 고용자는 계약 당사자를 반드시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는 규정이었다. 그러나 실제 취지와는 달리 정규직 (교수의 경우 tenured, 다른 직책은 permanent position)의 자리가 없는 경우 그 사람을 더 고용할 수가 없게돼, 오히려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5년의 계약 후, 같은 직장에서 다시 일하고 싶으면, 정규직으로 승진하거나 또는 다른 곳에서 6개월 이상 근무한 후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Verpoorte 교수 연구실에서 3번의 계약을 받은 후, 나도 그 당사자가 됐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몰랐다. 대학에서 나와 같이 연구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의 경우, 정규직이란 것은 tenured position에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는데,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 곳도 교수로 갈 사람은 이미 경력 초창기부터 주변사람이나 지도교수가 앞길을 안내해주거나, 최소한 선배 교수들이 하던 길을 따르는 것이었느데 나에게는 그런 정보나 도움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 앞길이란 것이 주로 지원 연구비 (grant)와 관련이 있다. 모든 인문, 사회 자연과학분야에서 네덜란드 전역의 개인 연구자들이 나이별로 함께 경쟁하는 여러 개의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이 있는데, Rubicone, Veni, Vidi, Vici 가 대표적이다. 고대 로마시대 장군 시저 (Caesar)의 전기에서 나온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그 어원은 시저의 정복 전쟁 중 건넜던 Rubicone 강, 그리고 원로원에 보낸 편지에서 말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다. 박사후 년수에 맞게 책정이 되어 매년 전국의 모든 과학자들이 경쟁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네덜란드에서 졸업한 사람이 교수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졸업후 1년안에 Rubicone grant를 지원하고, 3년안에 Veni, 6년안에 Vedi, 그리고 15년안에 Vici grant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European grant 인 ERC… 

요즘은 더욱 심해졌지만 그 당시도 마찬가지로, 교수임용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연구비를 대학에 가져올 수 있느냐 였다. 따라서 tenured 자리에 지원하고 싶은 사람은 최소 Veni grant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의 경우 이곳에서 모든 학위를 한국에서 취득하였고, 도착하니 Veni의 연차는 이미 지났으며, Vidi 나이에 심지어 누구하나 그런 것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주변에 한국사람, 아니 심지어 아시아계도 없었고, 또 내 분야 (천연물학)는 생물학과에 전혀 어울리는 전공이 아니었었기 때문에 자리가 날리도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 3번째 계약이 끝난 후 내 2년 월급 및 연구비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2년은 더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나도 엄밀히 말하면 계약직이였던지라 더 이상의 계약은 허용이 안되었다. 그래도 운좋게도 마지막 계약 끝의 2년은 내 연구비로 있었으니 남들 보다는 조금 더 있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Leiden 대학을 떠나야 했다. 엎친데 덥친격으로, 그동안 내가 누려왔던 행복을 한번에 뒤업겠다는 듯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해 예상하지 못해던, 대학의 인원 감축, 내가 속해 있던 Ledien 대학 IBL의 구조조정!

Leiden 시청앞 전경 (1). 네덜란드에서 가장오래된 베드로 교회 (Pieterskerk, 2). 1607-1608년 Pilgrim들이 베드로 교회 주변 살았던 골목 (3).조지 부시 전 미국 대룡령이 베드로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 (4). 
지금이야 Leiden이 12만 정도의 작은 도시이지만, 몇세기전만 하더라도 Amsterdam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실제로 어린 Mozart가 18세기 초 유럽전역의 연주 여행을 떠날때 이 곳 Leiden도 방문여행지 중 하나였다. 따라서, 현재도 사진 (1)처럼 Leiden은 도시규모에 비해 상당히 큰 시청을 가지고 있다. Leiden이 또 유명한 것은 현 미국의 시조 (Pilgrim)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도중 1년을 이 곳에 머물며 지냈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베드로 교회 Pieterskerk)에서 필그림들이 도착해서 첫 예배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들 중 몇몇은 미국 대통령의 조상으로 알려져있어, 전대통령 조지 부시 부자나 오바마가 방문했을 때 직접 방문하여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였다 (사진 4).

대학의 구조조정은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드라마나 신문에서만 봐왔던, 그런일이 나에게 이뤄지다니! 기본적으로 모든 네덜란드 대학은 국립대학이다, 다시말해 많은 부분을 정부의 제정적 보조에 의존한다. 그래서 자국민의 경우 대학 학비가 1년에 우리나라 돈으로 단돈 50만원 미만이다 (물론 외국인에게는 따로 책정된 높은 학비를 받지만). 이러한 정부의 보조는 지원하는 학생수에 비례하는데 생물학과의 학생수가 그 당시 많이 줄어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도 주변 교수들과 그때에 대해 이야기 하면 정말이지 모두에게 암담한 시기였다. 
첫번째로 임시 학장이 기존 학장을 대신해서 부임하여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모든 일에 토의를 너무 좋아해서, 회의에 회의를 더하는 네덜란드사람들 이었지만 (오죽하면 네덜란드 사람들과의 미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다음 약속 잡는 것이라고 까지 했을까?), 구조조정은 전혀 달랐다. 계획, 결정, 그리고 시행, 그 사이에 그 어떤 토론이나 재고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구조조정의 목표는 간단했다. 전 정규직 (비서, 행정직원, tenure tract 조교수, 기술직을 망라하여)의 25%를 내보내는 일이었다. 물론 나야 어느 것에도 해당이 안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우리 연구실의 비서 및 모든 technician들이 학교를 떠나야했다. 정말이지 학생을 제외한, Verpoorte 교수님  밖에 남지 않았다. 나도 5년 제한 규정 에 따라 6개월 이상을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두가지 문제가 갑자기 내 인생에 사전 경고없이 끼어드는 그런 때였다: 어디로 가지? 그리고 돌아오면 어떻게 이 대학에서 살아남지?

우선 급한대로 1년여 이상을 갈 수 있는 곳을 알아봐야했다. 다행히 그 동안 공동연구를 수행하던, TU-Delft 공대의 교수님 Geert-Jan Witkam이 여분의 연구비가 있어, 잠시 조교수로 근무할 수 있게 해주셨다 (tenure tracker가 아닌 non-tenured position). 1년여간 ionic liquids를 추출용매로써 개발하는 연구를 하기로 합의하고 마침내, 정든 Leiden 대학을 떠났다. 사실 내 박사논문도 서강대 공대 화공과에서 거의 수행했었기 때문에 그런 공과대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타국에서 너무나 다른 연구 방향과 분위기에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Sucrose (1), fructose (2), glucose (3), malic acid (4), sucrose-fructose-glucose (1:1:1, 5), sucrose-magic acid (1:1, 6). 
발견이란 것이 정말 가끔은 우연한 기회에 얻어진다. TU-Delft에서 ionic liquids (고체의 시료를 섞게되면 물질가 ionic bond에 의해 액체로 바뀐다)에 대해 연구하던 중, 모든 ionic liquid들은 인간에 의해 합성되는데, 정말 우연히 ‘그럼 자연도 이런 현상을 이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장난삼아 천연에서 나오는 고체 물질을 섞고 물을 증발시키니 마술처럼 고체로 돌아가지 않고 액체로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 이 연구가 내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을 줄은 그 당시에는 정말 몰랐다 (Plant Physiol, 2011, 156, 1701-1705). 

그럭저럭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고 연구 목표였던 ionic liqui에 대해 공부하고 응용분야를 개발하던 중 정말 우연찮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인간이 발견하고 이용한 ‘두 고체를 섞으면 액체로 바뀌는 현상’이 자연에 있다면 나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 가졌던 많은 의문점들이 해결되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동식물이나 미생물등 어떤 살아있는 유기체에서 물이 유일한 medium 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천연 성분들은 물에 전혀 녹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그 것들은 어떻게 생체내에서 생합성되며 저장되고 운반되는 것일까? 만약에 물이 유일한 자연의 medium이라면 사막에서의 식물들은? 수백년간 물없이 생명을 유지하는 수 많은 씨앗들은? 바닷물도 완전히 얼어버리는 극한지역의 식물들은? 식물이 곤충들을 잡기 위해 분비하는 액체가 단순 물이라면 자연에서 바로 증발될 텐데… 

이런 기초 생물학적 의문들이 갑자기 어느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당시 시간이 많다보니 생각이 많아져서 그랬나 보다. 여하간, 그런 의문점들에 달려들기 위해, 그 간 내가 행해왔던 식물 Metabolomics data 를 – 다행히 그 당시 많은 식물의 metabolomics 데이타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 우선 살펴보고 모든 식물에서 가장 많은 몇가지 물질들을 추려보았다. 대부분이 당이나 아미노산, 유기산, 아민류었다. 그 중 어느 식물종을 막론하고 대량으로 존재하는 choline과 사과산 (mailic acid)을 선택해 물에 녹인 후 다시 그 용매인 물을 며칠에 거쳐 제거한 후 그 상태를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초기의 고체 상태와는 전혀 다른 액체 상태였다. 

이 발견을 통해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가 있었다. 식물의 예를 들면, 평상시에 액포 (Vacuole) 등에 많은 물질들이 물에 용해 되어있지만, 외부환경에 따라 물의 함량이 극소량으로 적어질 수 있다. 그러면 그 용해되어있던 모든 물질들은 결정화되어 생명을 위협하게 되지만, 자연은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고자분자간의 거리가 가까와진 고체가 상전환을 일으켜 액체로 변하여 물대신 그 역할을 하게된다. 정말이지 이 가설과 발견은 우연이었다. 이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에게 안정된 직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TU-Delft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Leiden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짧은 Leiden 밖의 시간 동안 연구 방향만이 아니라 다른 면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신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연구를 단순한 재미로서만이 아니라 어떻게서든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순진한 과학도에서 현실을 인식한 생활인으로의 전환? 또 다시 계약직으로 일하다 보면 5년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비록 내 자신 이외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는게 없었지만 - 예를 들어 일하고자 했던 IBL에서 나의 이질적 연구주제, 구조조정, 외국인, 가뜩이나 늦게 시작했는데, 점점들어가는 나이… 그러나 이 모든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나에게도 이제 가족이 있다는 것이 나름대로 그런 현실적 생각을 할 수 있던 추진력이 된 것같다. 

사실 그 전까지는 한국이나 네덜란드에서 어떠한 자리도 내 스스로에게 주입시키거나 요구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던게 사실이다. 약대를 어떻게든 졸업하면 취직은 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 일 할 수 있는 교수직은 이미 교수님들이 다 정해 놓으신 것이었으니,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고, 이 곳에서도 외국인 그것도 유럽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써 스스로 내 자신을 제한을 했기때문 그런 문제를 등한시, 아니 솔직히 말해서 외면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나만의 생각 및 목표를 바꾼다 한들, 내가 가려는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던 그런 상황, 의욕은 있었으나 방법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목표가 이루어질지 아니면 나의 단순히 과욕으로 끝날지. <다음회에 계속>


Leiden 역앞 자전거 보관소. 옥외 자전가 보관소 (1). 실내 자전거 보관소 (2). 사진 출처: 영남대학교 약학대학 정병선 교수가 2019-2020년 내 연구실에서 객원 교수로 일할 때 촬영한 사진 일부를 제공.
전세계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처럼 자전거를 생활에 많이 활용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자전거타기 좋은 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중 가장 크지 않을까? 네덜란드는 이름 자체 (저지대)에서 알 수 있듯 모든 땅이 다 평평하다. 가장 높은 땅이 300m가 체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산이라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이 곳에서는 각 역마다 사진 속 과 같은 자전거 주차장이 있어 많게는 몇천대가 한번에 주차되어있다. 대부분이 자전거로 통학이나 통근하고, 멀리서 오는 사람은 기차나 버스로와서 역에 있던 자전거로 학교나 직장으로 이동한다. 

<필자소개> 
최영해 교수는 1988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학과에 입학 후 1992년에 졸업(46회), 1994년과 2000년에 각각 약학 석사, 박사 학위를 서울대 약대생약학 연구실에서 취득하였다. 그 후 2002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박사 후 연구원, 주임 연구원, 조교수 등을 거쳐 2014년부터 정년보장 부교수가 되어 현재까지 Leiden 대학 Institute of Biology (IBL)에서 재직하고 있다. 30년의 연구 생활 동안 식물화학, 대사체학, 분석화학, 식물생태학, Green Chemistry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여 왔고 현재 이 모든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영해 동문의 부인인 김혜경 박사도 서울대 약대 49회 졸업생으로 최교수와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에서 생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 후 20002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현재 Leiden 대학에 재직 중이다. 슬하에 2006년에 태어난 딸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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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 조곤조곤 이야기해주시는, 유럽에 정착한 약학자로서 과정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1.03.02 11:05)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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