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정착한 한국인 약학자의 인생편린 <1>

<특별기고> 최영해 교수 / 네덜란드 Leiden대학 Institute of Biology (IBL)

기사입력 2021-02-22 17:57     최종수정 2021-02-26 13:49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튜울립과 물,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 
그러나 나에게는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는 치열한 삶의 터전…
필자 최영해 교수는 1988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학과에 입학 후 1992년에 졸업(46회), 1994년과 2000년에 각각 약학 석사, 박사 학위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생약학 전공으로 취득하였다. 그 후 2002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박사 후 연구원, 주임 연구원, 조교수 등을 거쳐 2014년부터 정년보장 부교수가 되어 현재까지 Leiden 대학 Institute of Biology (IBL)에서 재직하고 있다. 30년의 연구 생활 동안 식물화학, 대사체학, 분석화학, 식물생태학, Green Chemistry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여 왔고 현재 이 모든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영해 교수의 부인인 김혜경 박사도 서울대 약대 49회 졸업생으로 최교수와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에서  생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 후 2002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현재 Leiden 대학에 재직 중이다. 슬하에 2006년에 태어난 딸 하나가 있다. 본 특별기고는 3회에 걸쳐 소개 될 예정이다. <편집자 주>

들어가는 글

오늘도 날씨가 흐리다. 아니 흐리기만 하면야 어느정도 참을 수 있으련만 게다가 비까지 며칠째 추적추적 내리니 이 힘든 시기에 사람을 더욱 가라앉게 만든다. 처음 이 곳 네덜란드에 왔을 때 누군가가 우스개 소리로 네덜란드 날씨에 대해 말한 것이 기억난다. 9월 부터 3월 초까지 해를 보기 정말 힘들고, 한겨울에도 한국에서 보는 함박눈 같은 뽀사한 눈보다는 스물스물 피부속까지 파고드는 비를 더 많이 맞게 될 것이고, 그래서 정말 못 참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할 생각이 나면 -이 곳은 사실 강보다는 운하이지만- 그때서야 해가 살며시, 오래도 아니고 아주 잠깐 나타난다고. 올 겨울은 특히나 여느 해와 달리 세상이 온통 우울한 소식으로 가득 차니 더욱 이 겨울의 축축함이 뼈속까지 스미는 것 같다. 

그래도 며칠 전 매일 내리던 빗속에 잠시나마 나타난 해 때문에 무지개가 우리집 근처 에 생겨 올해는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생긴다. 세상이 어려워지니 별 근거 없는 초자연적 현상에 기대는 내 모습이 조금은 부끄럽지만 그래도 믿어 볼란다. 
얼마전 내가 그간 네덜란드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관한 글을 부탁받았을 때, 처음에는 글재주라면 잼병인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다가, 그래도  이 곳에서 생활한지 어언 20년이 되가니 뭔가 정리도 하고싶고, 또 이 곳 유럽에서 일하고 싶은 후배들도 있을 수 있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졸필의 부족함을 잠시 뒤로하고 펜을 들어본다. 

2020년 12월 말경 집앞에 생긴 무지개. 네덜란드는 고도에 따른 기온차가 크고, 날씨의 변화가 심해서 한국보다는 훨씬 자주 무지개를 본다. 그렇다고 내 인생에 더 많은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 같지는 않지만…

찰나의 선택, 영원의 결과

여러 인생을 살아봤으면 그 중 어떤 것이 좋고 또 더 좋아질 수 있을지 말할 수 있으련만 다른 여느 이와 마찬가지로 그냥 주어진 시간과 상황에 순응 해가며 단 한 번의 생을 살아 왔기에 뭐라 딱히 충고를 할 수는 없고, 단지 내가 해온 것들을 소개하며 외국, 특히나 유럽생활을 생각하는 후배들에게 내 자신의 몇가지 예를 통하여 그들의 미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내가 네덜란드에 오게 된 경위를 돌아보면 흔한 시체말로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인생은 매순간 컴퓨터 언어의 이진법 배열처럼 중간이 없는 ‘예’, ‘아니오’의 선택이 싸여 종국에는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되는 것처럼. 

하멜표류기 프랑스어 판 (1). 네덜란드 알크마르 (Alkmaar) 근처의 더라이프 (De Rijp)에 세워져 있는 벨테브레 (Jan Janse de Weltevree)의 동상 (2). 이준, 이상설, 이위종 (3).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 전경 (4). 전투에 사용할 무기와 장비를 확인하고 있는 유엔연합군 소속 네덜란드 군 (5). 2002년 월드컵에서 헹가레를 받는 히딩크 감독 (6).
사진 출처. 1: 하멜이 박연을 만났을 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506161756421), 
2: 나무위키 (https://namu.wiki/w/얀%20야너스%20벨테브레), 
3 과 4: 이준열사 기념관 홈페이지 (http://www.yijunpeacemuseum.org), 
5: 위키백과 (한국 전쟁 참전국 네덜란드, https://ko.wikipedia.org/wiki/한국전쟁참전국네덜란드, 사진은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6: AP 통신
네덜란드는 우리나라 남한 인구, 면적 모두 1/3 정도로 (따라서 우리나라와 인구밀도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국토 70%가 산인 우리나라와 달리 전지역이 평지여서 체감인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유럽내에서도 작은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이 작은 나라가 알게 모르게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국을 처음으로 서양세계에 소개한 하멜 표류기를 쓴 하멜 (Handrick Hamel)도 네덜란드 선원이었고, 하멜이 조선에 도착했을 때 (1653년), 이미 벨테브레 (Jan Janse de Weltevree, 한국명: 박연)가 조선군 무장의 직책으로 총이나 대포를 비롯한 많은 서양식 무기 제조를 도와주고 있었다. 후에 하멜은 13년간의 포로생활 후 탈출하여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갔지만 박연은 조선에서 결혼하고 자식도 낳아 생을 마감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듯,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특사(헤이그 특사)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신, 이준, 이상설, 이위종 지사님들도 네덜란드와 연관이 되어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16개국 중 네덜란드도 포함되어있다. 특히나,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큰 피해로 자국군이 궤멸 직전의 수준 까지 같지만 자유수호라는 기치아래 민간차원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1개 대대 와 5척의 구축함). 
또 가장 가깝게는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히딩크 (Guus Hidink)도 네덜란드인. 재미있는 것은 하멜이 탈출 후 네덜란드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한일은 다른 무엇보다 밀린 임금을 자기가 속해있던 선박회사에 요구하고 소송까지 간 것이다. 하멜 표류기도 사실은 그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보고서 형태로 쓰여졌는데 유럽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각국에 번역 출판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네덜란드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 현실 인지능력은 똑 같은 것 같다. 13년 포로생활 후 도착하여 가장 먼저 한일이 임금 소송! 

내가 졸업할 당시(2000년)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박사학위를 받고 1년여간 학교에 남아있으면서 뭘 할까 고민을 했다. 내가 박사학위를 시작할 때 군미필자는 병역특례의 하나로 학교에서 박사과정 포함 6년간을 무보수로 있으면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보수로 있기에는 정말 긴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했기에 나도 그냥 그게 좋은 것이려니 하고 따라갔다. 같은 연구실에서 석사 2년, 박사 6년, 그리고 그전 특수연구생으로 2년, 도합 10년을 머물다 막상 떠나려 하니, 마치 형기 마친 출소자가 자유가 되었지만 뭘 할지 몰라 당황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특별히 어떤 직업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전공한 천연물 전공자를 특별히 채용하는 회사도 적어 정말 막막한 시기였다. 나이 3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출소하는 심정으로, 처음으로 취직이라는 것을 해야했는데 정말 막연했다. 할 수 없이 동기나 선배들이 그 당시 늘상하는 외국으로의 박사후 연수도 생각해 봤는데 외국에 아는 대학이나 연구소는 전무하고 추천해 주는 사람도 주위에 전혀 없었고… 남들에게 들은 데로 미국 연구소나 학교에 두세 통의 편지를 보내 봤는데 답장은 모두 지금은 자리가 없으니 다음에 하라는 아주 상투적인 답장뿐… 

Leidend 시내에 있는 운하 중하나 (1). 내가 처음 네덜란드 도착해서 4개월 가량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2). 
사진 속 게스트하우스는 지금은 새로 개조해서 산뜻하게 보이지만. 내가 살았던 당시는 아주 오래된 건물이었다. 건물만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오래된 ’uninvited guests’(쥐나 비둘기 등)도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그리고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그 건물의 이름이었다. 
네덜란드 언어의 발음은 아주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나 ‘G’ 발음이 나같은 외국인들에게는 무척이나 까다롭다. 글을 읽을 때야 독일어와 아주 조금은 유사해 독일어에 익숙한 나에게는 그래도 조금은 뜻을 유추할 수 있었지만, 일상생활에서 듣고 말하는 과정에서는 전혀 다른 발음이 많았다. ‘G’ 발음은 독일어의 ‘CH’ (목을 긁으면서 나오는 ‘흐’)와 비슷하다. 문제는 이 ‘G’가 수많은 단어들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네덜란드어의 분사형은 대부분 ‘GE’로 시작하는데, 대화를 하고 있으면 계속 ‘흐, 흐, 흐’가 들려 상당히 듣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 내가 처음 살았던 사진속 게스트하우스이 이름이 ‘Hooigracht’, 내가 일했던 곳이 ‘Gorlaues gebouw’. 처음 도착해서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또는 내가 일하는 곳이나 사는 곳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즈음 다행히 과학재단에서 박사후 외국 연수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해외체제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지원하였다. 지원은 했지만 경쟁률이 상당히 높아, 사실 이 것도 들리는 말이었지 얼마나 높은지 잘 몰랐다, 선정될 가능성은 상당히 적었다. 누군가 지원지역 편차를 줄이기 위해 비미주권을 지원하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기에 유럽으로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막상 지원서에 적을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고 있었는데 그나마 미국은 주위에서 들리던 풍문으로 몇몇 대학을 알 수 있었지만, 유럽은 완전히 나에게는 미지의 지역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어차피 지원금은 1년이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생각없는 결정이었지만 그냥 1년동안 여행한다는 생각으로 주변 경치 좋은 대학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스위스, 새하얀 알프스, 수정같이 맑은 호수, 그림 같이 예쁜 집들, 그래서 Swiss Lausanne 대학을 선택하여 그곳 책임 교수분께 연락드렸더니, 답장이 없었다, 심지어 체재비도 내가 가져간다고 했는데… 

과학재단 지원 마감시간이 다 될 때까지 전혀 연락이 없어 당황하는 사이, 그전 생약학회에서 한번 뵈었던 Verpoorte 교수님께 편지를 써, 내 상황을 설명하고 혹시 유럽의 연구소나 대학 중 추천할만한 곳이 있는지 여쭤봤다. 몇몇 추천 대학과 함께, 자기 연구실도 가능하다고 하기에 다른 곳에 연락을 주고 받을 시간이 없어 그냥 그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 곳이 뭘 하는지, 그 곳 연구실 상황은 어떤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인생을 생각없이 던져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 그냥 Verpoorte 선생님 연구실을 과학재단 지원서에 적었다. 어차피 내 지원이 선정될 확률도 낮고, 1년이면 하얀 알프스에서 형형색색의 튜울립으로 바꾸는 것도 그닥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렇게 지원을 했다. 

사실 후에 지원을 다 한 후 Lausanne 대학의 Hostettmann 교수님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자기가 여행중이라 답장이 늦었다고. 그래도 어쩌랴 이제 떠나간 배인데… 지금도 가끔씩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스위스에 갔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모든 것을 떠나 최소한 지금 쓰고 있는, 그렇게 듣기에 아름답지 않은 네덜란드어 대신 우아하게 프랑스어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1년만에 뭘 얼마나 할 수 있었겠냐 만은…

Keukenhof의 튜울립.매년 4-6월 사이 네덜란드에서 생산하는 튜울립을 포함한 많은 꽃들이 이곳 Keukenhof 야외에 전시된다. 원래는 관광객 보다는 직접 화홰를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연중 행사하였으나, 지금은 오히려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의 네덜란드 관광 필수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튜울립만 보다가 막상 이곳에 와보니 정말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다. 어떤 것은 튜울립이라 말하기 전까지는 다른 꽃인 줄 알았다. 

우여곡절끝에 지원하고 면접을 보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래도 막상 지원한 거라 내심 기대했는데 전혀 뜻밖에도 합격! 드디어 나도 말로만 듣던 외국생활을 경험하게 되다니! 합격했을 당시에는 지원금이 1년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는 한국에 돌아와 직장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인 문제보다 그 당시의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그런 우려를 잠재웠다. 

남이 보기에 최악의 수? 가끔은, 아주 가끔은 일생일대의 기회!

처음에 지원하고자 했던 산좋고 물좋은 스위스도 막상 이민을 가려면 우리에게 일반적 상식 이외에 알려진 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네덜란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다른 미주의 나라에 비해 네덜란드는 한국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나라라 막상 준비하려니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내가 아는 네덜란드라고 해봐야, 구멍난 댐을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한 소년, 고호, 그 당시 축구국가대표 감독 히딩크가 전부였다. 

외국으로 박사후 연수를 가는 내 동기들은 거의 다 미국(아주 가끔씩 일본도 있었지만)을 계획하고 있어서 물어보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나 자료가 주위엔 많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도움이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거기다, 언어의 문제, 영어도 아닌 제 2 외국어 그 것도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와 달리 전혀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어. 준비기간은 단 2개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가려던 곳에 이인경 박사님이 계셨었는데 이전에 간다는 연락도 못 드리고 도착해서야 그곳에 계신 줄 알았다. 

그 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연수생활에 대해 제대로 준비한 것이라고 해봐야 이태원에 가서 산 이민가방 두개, 그리고 다른 준비는 못해도 먹고는 살아가야 했기에 숟가락, 젓가락, 양념까지, 진짜 연수 과정자가 아닌 어디 오지로 떠나는 이민자처럼 꾸역꾸역 챙겨 넣었다. 물론 네덜란드어 교본도 있었지만(다행히, 그 당시 교보문고에서 한국외국어대에서 발간한 네덜란드어 문법집 몇 권이 있었다) 구입 후 한번도 펴보지 않은 것 같다. 발음도 어떻게 하는 지 모르는 언어를 책으로 혼자 공부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네덜란드에 대해 무지했었는지 도착하는 날짜를 4월 30일로 잡았다. 그 당시 여왕 Beatrix의 생일, 전국민의 공휴일. 공항에 도착해서 꾸역꾸역 무거운 가방을 들고 Leiden 기차역으로 가서 비서를 기다리는데 2시간이 지나도 나오지를 않았다. 휴일이라 다른 약속때문에 늦었다고 했다. 아무 연락도 없이 기차역 앞에서 부랑자처럼 기다린 그 2시간이 내 인생에 가장 무섭고 힘든 시간이었다. 

네덜란드 대표 음식인 Stropwafel (앏은 와플 사이에 시럽을 넣은 과자, 1), Pannenkoeken (네덜란드 전통 팬케잌, 2), 절인 청어 (Haring, 3). 
네덜란드는 다른 여타의 북부 유럽 국가들과 같이 강한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으로 검소, 절약등의 초기 기독교의 절제된 생활습관이 사회 전체에 아직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아직도 뭔가를 화려하게 꾸미거나 먹고 마시는 데 투자하는 것에 인색해 축제나 먹거리 문화가 남달리 발달한 남부 유럽과는 사뭇 다르다. 실제로, 네덜란드에는 많은 교회가 있지만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교회 내부에 스테인드 글라스를 거의 볼 수가 없다. 
음식도 따라서 검소한 데 굳이 고르자면 위 사진의 3가지 음식 정도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화려한 음식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너무 소박하지않나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정도 정이 든다. 특히 Haring은 많은 외국인들에게는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음식이다. 청어를 잡은 후 내장과 머리를 제거하고 기름과 소금에 단시간 절여 양파와 함께 먹는 음식인데, 나이프나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입에 넣어 마치 물개가 생선 먹는 듯 한 모습으로 많은 외국인이 도전해 보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음식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생선회를 잘 먹어서 별 무리없이 지금도 즐기지만, 많은 한국사람들에게는 그리 인기있는 음식은 아니다. 

결국은 2시간 기다림 끝에 비서를 만난 후 내가 묵을 방으로 안내 받았다. 지금은 Leiden 대학이 학생 기숙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스트하우스를 비용 절감 때문에 운영을 중단했지만 그때 당시만해도 몇몇 곳에 나와 같은 박사후 연수생이나 방문연구원이 짧게 묵을 수 있는 건물이 남아있었다. 그 중 한 건물에 방을 예약해 들어갔다. 그때 방에 들에 갔을 때, 아니 사실 그 건물에 들어갔을 때부터 나기 시작한 이국의 냄새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래된 건물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또 그 당시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던 서양냄새라 불리던 특유의 냄새가 어우러져 펴져 들어오니 아, 진짜 내가 외국에 왔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방에서 여장을 풀고 학교 가는 길을 물어본 후 비서를 돌려 보내고 오지않는 잠을 청하며 누웠다. 다음날 있을 첫 출근을 기대하며.

내가 도착한 날이 4월 마지막 날이었으니 5월이 사실상 나의 네덜란드에서의 첫 달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이 곳 네덜란드의 5월은 정말 휴일이 많다, 모두 기독교에 관련된, 엄밀히 말하면 카톨릭에 더 가깝고 대부분이 예수님 부활과 승천에 관한 명절이다. 

네덜란드에서 생활하면, 정말 예수님이 5월에 많은 일을 하셨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다. 실제로 네덜란드인의 종교는 프로테스탄트가 훨씬 더 많지만, 이상하게 공휴일은 카톨릭 명절을 많이 가지고 있고 다른 나라에서는 심지어 카톨릭이 대세인 지중해 연안의 남부 유럽에서도 공휴일이 아닌 그런 기독교 기념일도 네덜란드에서는 공휴일이다. 지금이야 쉬는 날이 많으니 예수님의, 그 5월의 활발하신 활동과 네덜란드인들의 알 수 없는 공휴일 강박증이 정말 고맙지만 도착한 첫 달 그 많은 휴일을 집에서, 생면부지의 곳에서 보낸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또 그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상점은 평일 오후 6시 이후나 주말에는 열지않았다. 심지어 Verpoorte 교수님을 직접 만난 게 도착하고 나서 한달 가까이 지나고 나서니, 그 기나긴 시간, 매일 방안에서, 전화 인터넷도 없이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오랜만에 학교 갈 날이면, 아무 계획, 기대도 없이 연구실에 가서 그럭저럭, 책상에서 시간 때우다가 다시 집에 오고. 학교에서도 내 짧은 영어로 동료들과 대화도 오래 못하고, 뭘 할지도 아직 모르고 집에는 전화나 인터넷이 지금처럼 가능하지 않으니, 연락도 안되고. 유일한 친구라면 집 창밖 비둘기, 가끔씩 나오는 생쥐가 - 아주 작고 새까맣고 큰 눈을 가진 - 전부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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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경 추천 반대 신고

저도 이전에 영국 유학을 갔던 기억이 나, 교수님의 글을 정독하며 읽었네요 ㅎㅎ 글만 보아도 20년전 그 시간들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짐작이 갑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글도 기다리겠습니다.
(2021.02.26 16:05)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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